[책] 생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정말 니나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책을 읽는 와중,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의 밑바탕에는 나는 니나처럼 살 수 없을거야 라는 생각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니나라는 사람을 생이라는 것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로 채우는, 그리고 자신이 채운 것을 충분히 느끼며 생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내가 죽어야한다면 알고 싶습니다. 죽음은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데 왜 의식 없이 받아들여야 해요? 마치 도살당하기 전에 머리를 얻어맞는 짐승과도 같이... 나는 깨어 있고 싶어요.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요. 죽음은 굉장한 것일 거예요. 멋질거예요.
니나는 죽음까지도 온몸으로 체험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니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우리 생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체험하는 그 무엇이다. 죽음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생을 살며 우리는 무엇을 할지 매번 선택을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죽음만을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니나와 같이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체험할 그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나중에 죽게 된다면 자다가 죽고 싶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과연 이 생각을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난 후회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몇백 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몇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니나는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몇백 개의 가능성(실제로는 몇백 개가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나, 책 속의 표현을 빌려 몇백 개라고 하자.) 중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 특정의 하나가 미리 정해져있다고 니나가 생각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니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그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미리 정해져있었다고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 있지만 책의 전반적인 니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여서 의외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대화가 이어진다.
내 생각으로는 네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너의 수많은 자기 중의 한 개에 너를 고정시키지 않았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야.
아, 바로 그래서 문제인 거야, 라고 니나가 소리쳤다. 나는 생 가운데를 방랑해 다니고 있어. 마치 집시처럼 애들이 있는데도 나는 아무 데도 속해 있지 않아. 나 자신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 걸 뭐. 내가 이번에는 나 자신과 세계 내에서의 나의 장소를 확실히 알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얼마 안 있어서 그곳을 떠나가게 되고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고 떠내려가버려서 땅도 집도 없어지고 말리라는 것이 분명해져. 그렇게 해서 나는 또다시 불안정 속에 혼자 있게 되는 거야. 내 생에는 뚜렷한 선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니나가 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인데, 마지막 구절이 인상깊어 책을 접어뒀다. 니나가 말하는 뚜렷한 선이라는 것이 뭘까?
나는 나의 패배에 관해서 써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 나는 한 달 전에 니나를 방문하기 위해서 웬하임에 갔었다. 그리고 나는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패배의 정도를 내가 승인할 용기가 생기기까지 한 달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 기록하는 것은 나에게는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기록한다는 것은 사정없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상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 그것을 해야 한다. 나는 다시는 니나를 만나지 않겠다. 그리고 이 기록과 더불어 내 생의 이 장이 결정적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내가 슈타인의 일기 중 제일 천천히 읽었던 부분이다. 나는 나의 패배에 관해서 써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라며, 굉장히 자기 고백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그의 감정이 글에 충분히 녹아있는 듯 했다. 그만큼 슈타인이라는 인물에게 몰입이 더 되었던 부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애기해서는 안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고독하게 있게 되기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 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이해가 안되지는 않았다. 때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하고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해준다면 난 그와 아주 가까워지고 싶다고, 아주 가까워졌다고 생각을 할 것만 같다.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생의 의미를 묻지않고 그냥 살아가라는 것인가? 난 그동안 꽤 많이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다. 아직 이 말이 많이 와닿지는 않지만 언젠가 니나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렇게 다시 한번 책을 훑어보니 내가 니나에게 느낀 감정은 경외감인 것 같다. 나라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나는 니나보다는 니나의 언니와 같은 삶을 살아왔고, 책 속의 니나의 언니처럼 니나를 동경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이 책을 조금 급하게 읽는 바람에 충분히 느끼지 못했는데 나중에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기 때문에 꼭 언젠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이 책을 다시 펼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