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산티아고 - 에필로그

다녀온 지 거의 1년이 되어서야 쓰는 산티아고 순례길 회고. 그곳에서 했던 생각들, 경험들 등 기억해 두고 싶은 것들을 기록해 보자.

어쩌다 산티아고 - 에필로그
어쩌다 산티아고 - 프롤로그
퇴사 생활 4개월 차, 이제 슬슬 다시 일을 해야할까? 라는 이상한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6월이었다. 퇴사 생활 이대로 괜찮은가 대책을 마련하던 중 언젠가 들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났다. 약 800km를 걸어가며 말 그대로 순례하는 여행.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냈겠지만, 저 이상한 생각을 물리치기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았다. 평소엔 행동력 제로인

위 글에서도 썼지만 충동적으로 산티아고행을 결정하고 무작정 갔지만 아래 포스팅처럼 어찌어찌 잘하고 돌아왔다. 🎉🥳🎊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순례길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그나마 작성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곳에서 했던 생각들과 앞으로 기억해 두고 싶었던 것들을 기록해 보자.

현재와 미래 그리고 의지박약

내가 순례길을 걸었던 2022년 7월의 스페인은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그래서 태양이 나를 괴롭히기 전에 다음 목적지 마을까지 도착해야만 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최대한 일찍 출발해야 했고, 거의 매일 새벽 4~5시에 출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난 지독한 의지박약이다. 의지박약을 고치고 싶지만, 의지박약을 고치려는 의지도 이 지독한 의지박약 앞에서는 무참히 박살나고 만다. 그런데 어쩌면 그동안 좀 살만해서 이런 의지박약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고통 앞에서는 이런 의지박약도 극복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게 건강하게 극복하는 방법인 것은 아니겠지만…) 아침에 침대에서 더 자고 싶어도 태양 아래서 고통받을 미래의 나를 생각하면 바로 눈을 뜨고, 오늘 힘들어서 덜 걷고 싶다가도 어차피 남은 기간 동안 더 걸을 사람은 미래의 나라는 생각에 조금 더 부지런히 생활했던 것 같다.

비록 가기 전에는 이런 짤을 올리면서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나였지만, 조금은 미래의 나를 생각하게 됐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살고, 현재를 즐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현재와 미래의 선을 유지하는 것은 항상 어렵지만 어쩌면 그게 삶을 살아가는 묘미일지도 모르겠다. 알잘딱의 영역은 언제나 내게는 너무 어렵기만 하지만, 현재에 충실하며 가끔 미래를 생각하자. 그 가끔 힐끔이는 미래가 가까운 미래 뿐 아니라 먼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쓸데없는 곳에서 경쟁하지 말자

어찌저찌 S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해서 순례길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걸어가다 보면 만났던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다들 걷는 거리가 비슷하고 걷는 속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난 덜컥 겁을 집어삼켰다. 내가 남들보다 뒤쳐져 있어서 남들보다 못난 사람이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은 그 생각에 잠겨 덜 쉬고 더 걷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사실 여긴 경쟁하는 곳이 아니고 그냥 혼자 묵묵히 걸어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혼자가 아니라 순례자들 모두 함께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주며 걸어가는 곳이 더 맞겠다.

경쟁사회에서 30년을 살다 보니 순례길에서도 경쟁하게 된 나, 비정상인가요?

그래서 난 그 순간부터 서두르지 말고 그냥 나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켜가며, 내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속도로.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은 길의 그늘진 곳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 이후에 다음 마을까지 갈 때 잔뜩 열이 오른 태양에게 두들겨 맞았다.)

경쟁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순례길 위에서는 아니었고, 남들과 비교하거나 경쟁해서 누가 더 잘하거나 더 빠르게 도착한다고 해서 나의 경험이나 성취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었다.

순례길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는데, 난 그중 이 쓸데없는 경쟁이나 비교를 피하고, 자신에게 집중하여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의 태도가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살다 보면 이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자.

힘든 일상에 재미 한 스푼

순례길에서 만난 인연 중 호세 할아버지 가족이 정말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난다. 그 가족은 호세 할아버지가 은퇴한 기념으로 할아버지와 두 딸이 같이 순례길을 걸으러 온 가족들이었는데, 어느 마을에서 같은 알베르게의 같은 방을 쓰면서 처음 만나게 됐다. 그렇게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자주 만나게 되다보니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특히 호세 할아버지랑은 같이 하루 종일 걷기도 하면서 더 가까워졌다.

그러던 중 일정 때문에 그 가족들과 헤어졌다가 Molinaseca로 가는 날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는데, 그날도 역시 호세 할아버지와 같이 걷게 되었다. 그날의 코스는 산을 하나 넘어가는 코스였는데 정말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힘들어하는 나에 비해 호세 할아버지는 정말이지 너무나 수월하게 다녔다.(그날 일기에도 적었지만 정말 닌자 그 자체였다.) 내가 힘들지 않냐고, 그렇게 잘 갈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니 그냥 재미를 부여하면 된다고 했다. 약간 게임처럼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폴짝폴짝 뛰어가면서 미션을 깬다고 생각하라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위험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그 말을 듣고 호세 할아버지와 같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다니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마을까지 금새 도착해 버렸다. 이게 바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건가 싶었다.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PT를 받게 되면서 선생님한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회원님 정말 힘들 때는 입으로 “즐겁다.”라고 말 해보세요. 그럼, 정말 즐거워지거든요. 그럼 그렇게 한 번 더 들 수 있는 거예요.

“즐겁다!”

세상 쉬운 것은 없지만 순례길은 좀 쉬울지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가다 보면 종종 문제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종종이라기보다는 매번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적어도 내 삶은 그렇다.) 게다가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렵고 설정한 목표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그 과정도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설정한 목표에 도달한다 해도 정말 만족스러운 성취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기란 더 어렵다. 정말 어려운 것 투성이다.

반면에 순례길은 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하는 것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내가 원해서 와있는 순례길에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저 매일 이동하는 것이다. 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와 내가 어느 정도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마일스톤이 있다. 특히 그 노란 화살표를 마주할 때면 약간 “넌 지금 잘하고 있어!” 라고 응원해 주는 느낌이라 더 힘이 난달까…?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하고 나면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그것을 같이 느낄 수 있는 다른 순례자들도 있어서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새삼 사는 것은 참 어려운 것에 비해 순례길은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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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다녀온 후로 꾸준히 지인들에게 영업하고 있지만 다녀온 사람은 한 명뿐…

그 밖에도

순례길에서는 엄청난 폭염을 맛보고, 서울에 폭우로 강남 일대가 잠기는 것을 보니 기후 위기가 더욱 두려워졌고, 심지어 출국하는 비행기에서 Don't Look Up이라는 영화를 봐서 더욱 와 닿았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깊은 대화는 하지 못했다.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라고 생각만 하고 하지 않았네...)

종종 악기가 있는 알베르가게 있는데, 다른 순례자가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기타도 배워보고 싶다.

걷는 것, 생각보다 괜찮은 취미가 될지도...?
난 정말 집을 좋아하는 집돌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걷는 것이 좋았고, 다른 곳도 걸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여 많지는 않지만 서울 둘레길을 종종 걷고 있다.

순례길에서 중간에 점프한 구간도 있고, 서둘러 걷느라 땅만 보고 걸었던 구간이 있다. 이게 조금 아쉽기도 하고 그냥 너무 좋은 경험을 해서 언젠가 또 순례길을 걸을 생각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잘 살아 보자.